비 문
1925년 1월 미에(三重)현이 발주하였던 기노모또(木本)터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공사에는 멀리 조선에서 건너와 가장 많을 때에는
200명의 조선인이 일하고 있었습니다. 공사의 마지막이 다가온 1926년
1월 2일, 한 조선인 노동자가 시시한 싸움으로 인하여 일본인에게 일본도
(日本刀)로 찔렸습니다.이틀 1월 3일 조선인 노동자가 그것에 항의하였던 바 기노모또주민들이
노동자의 합숙소를 습격하였고 거기에 대항하였던 이기윤씨가 무참하게
살해당하였습니다.
더구나 기노모또 경찰서장의 요청을 받아 기노모또 정장이 소집하였던 재향군인들의 손에
의해서 배상도씨가 노상에서 참살당하였습니다.그때부터 사흘동안 구 기노모또정이나 근린마을(현 구마노시)의 재향군인회, 소방조,
자경단, 청년단을 중심으로 한 주민들은 죽창, 쇠갈고리, 총검, 일본도, 사냥총등을 들고
경찰관과 함께 산이나 터널로 피난하였던 조선인들을 추적하고 모두 붙잡았습니다.기노모또 터널은 그 지역 일본인주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터널을 뜷고 있던 조선인 노동자를 지역주민들이 습격하고 두분을 학살하였던 것입니다.
그후 미에현 당국은 구 기노모또정에 살던 조선인을 모두 추방하였습니다.이기윤씨와 배상도씨가 조선의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일본에 일하러 올 수밖에 없었던
것도 타향에서 학살당한 것도 천황(제)아래 진행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그것에서 일게
된 조선인 차별이 원인이었습니다.조선인 노동자와 기노모또주민 사이에는 서로 친한 교류도 있었습니다. 당시 배상도씨의
장녀 월숙은 기노모또소학교 사학년생이었으며 사이좋은 친구도 있었다고 합니다. 습격당시
같은 합숙소의 일본인 노동자 가운데는 조선인 노동자와 함께 기노모또주민들에게 대항한
사람도 있었습니다.우리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두분의 서럽고 안타까운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며 두분의 학살의 역사적 원인과 책임을 따지기 위한 한 걸음으로서 이 추도비를
세웠습니다.
1994년11월
미에현 기노모또에서 학살된 조선인 노동자
(이기윤씨・배상도씨)의 추도비 건립회